군산시민신문

우리가 아는 직업(職業)의 사전적 의미는 ‘생계를 위해서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보편적 인식이 틀릴 수 있다는 소중한 경험을 하였다.

모든 것이 차가웠던 어느 해 겨울, 나는 한 세미나장에서 교육기관에서 선생으로서 살고 있는 내 삶에 있어서 꼭 기억(記憶)하면서 살아가야 할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나는 아주 드물고 소중한 행운을 얻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여리지만 따뜻한 인간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지만 강한 장인정신(匠人精神)을 지닌 사람이었다.

우연히도 두 사람은 1935년생 돼지띠 동갑내기로서,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 한국기능올림픽조직위원회 명예친선대사로서 함께 활동하면서, 1982년에는 이탈리아 대통령 문화공로훈장, 1997년에는 대한민국 화관문화훈장, 그리고 2000년에는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을 같이 수여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필생의 업인 패션디자인실을 동업자로서 같이 운영하고 있다. 60여년 전, 대한민국 남성 패션디자이너 1호로 출발한 그들의 이름은 한 사람은 앙드레 김이며, 다른 한 사람은 김봉남이다.

앙드레 김은 비록 그가 인터뷰 사진을 위해 시작했다는 짙은 화장술과 독특한 언어 구사로 과거 방송매체나 사람들의 농담 속에서 희화화(戱畵化)되기도 하였지만, 그는 섬뜩할 만큼 치열한 장인정신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고집하다 간 최고의 예술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직업이란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동감 있게 그리고 상징적으로 직업현장에서 몸으로 보여주었던 몇 안되는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옷을 시장에 내다팔기 위한 상품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었다.

“의상에는 꿈과 환상이 있어야 한다. 예술에서 감동을 느끼듯이 패션의상도 충분히 감동을 자아내는 창작예술이며, 나는 음악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닮은 패션으로 새로운 예술적 장르를 개척해 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평소 지론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입증하기 위해서 그는 50여년 이상을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5시면 일어나서 14개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고, 매년 2~3차례씩 여는 해외 패션쇼에 필요한 3백벌 이상의(1번의 패션쇼에는 150벌 이상의 작품이 필요하다고 한다)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서 하루 8시간 이상 자신만의 작품구상과 제작에 몰두해 왔다고 한다.

이러한 철저한 직업인 앙드레 김도 젓먹이 때 입양하여 직접 기저귀를 갈아가며 키운 아들이, 자신의 꾸중에 눈물만 흘리는 모습이 가슴 아파서 며칠씩 디자인 작업을 전폐할 때는 한 없이 여리고 감성적인 모성성(母性性)을 지닌 김봉남이 된다.

생전에 무엇보다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하였던 그는 작고한 천상병 시인처럼 천진무구(天眞無垢)한 ‘무공해 감정’의 소유자이었던 것이다

인간 김봉남은 자신의 성공에 대해서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말을 자주 하였었다. ‘사람들이 인식하는 성공의 잣대’를 예로 들기는 했지만, 아직 자신의 이름으로 된 빌딩조차 없는데 성공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 변(辯)이었다.

그러나 까마득히 오래 전인 1966년 프랑스 에펠탑에서 있었던 성공적인 패션쇼 이후에, 그가 다른 디자이너들처럼 여러 개의 의상실을 내고 고객수를 늘리는데 몰두했더라면, 국위 선양을 위해 해외에서 개최되는 패션쇼에 쏟아 붇는 에너지나 비용을 조금만 아꼈더라면, 생전에 보여주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윤택한 삶을 누렸을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이렇듯 인간 김봉남은 조금 더 윤택한 삶을 위해서 자신의 삶과 직업의 독창성을 포기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앙드레 김이라는 행복한 예술가로 남았다.

때때로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면 아련한 추억에 빠져들 듯이, 인간 김봉남은 앙드레 김이라는 이름으로 국민 모두를 ‘꿈과 환상’에 젖게 만든 것이다.

패션쇼를 하는 당일엔 다른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나서 중요한 일정을 망칠 수도 있다는 걱정에 모델들이 먹을 김밥을 손수 준비하는 인간 김봉남을 우리는 언제나 패션디자이너, 전문직업인 앙드레 김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선비는 호(號)로, 작가는 필명(筆名)으로 부르는 것이 예의(禮儀) 이듯이,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앙드레 김’이기 때문이다.

나는 앙드레 김을 좋아 했다. 그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목숨을 건다”고 할 만큼 치열하고 엄숙한 우리시대의 최고 장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앙드레 김을 좋아 한다. 생계만을 위해서 직업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창조적 예술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장원 가는 일이 쑥스러워 이발소에서 머리를 다듬을 만큼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나는 인간 김봉남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직업(職業)의 사전적 의미는 ‘생계를 위해서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삶을 걸 수 있는 특별한 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강태구 호원대학교 행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