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3.03.24(금) 426호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나눔의 메시지

 

48년만에 아름다운 상봉

48년전 14세의 주인공

월남전 용사와 고국의 14세 소녀의 48년만 해후 이야기와 사연

 

경제성장의 초석이 된 월남사병 때 가난을 극복하려고 전쟁터를 택한 한 장병과 강원도 산골 14세 소녀가 하얀 백지위에 써서 주고받은 사면 사연은 한편의 다큐멘트 드라마 “고국에서 온 소녀의 편지”라 할 수 있다.
열사의 나라 월남전에서 산화한 용사가 얼마인가. 그러나 40여년 훨씬 넘은 세월이 지났지만 그들은 국가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전쟁 후유증과 특히 고엽제로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어간 용사들과 참전용사 대부분이 생계마저 위협받는 현실은 우리 모두가 간과 한 것은 아닌지.
월남파병장병과 화천산골 중학교의 14살의 소녀가 주고받은 그 사연은 아름답고 가슴 시리도록 우리모두를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한 그때 그 주인공들의 48년 지난 인연의 끈이 아름답기만 하다.
한 소녀에게 오늘을 잊게한 두 주인공들은 (조용근, 최병락)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고 겸손하지만 결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48년의 긴 세월을 잊지않고 배움길을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와 사랑을 심어준 그때의 사연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가슴을 뭉클케 한다.
48년만에 이루어진 상봉의 기쁨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메마른 정서를 새롭게 심어준 한편의 드라마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감동적일 수 밖에 없다.
이 두 주인공들은 오늘도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길에 사랑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해 본다.   
 
편집자주

 

 


▶48년이 흐른 뒤 그녀가 보내온 사연


1966년 월남 전쟁이 한창일 때...

우리 한국에서도 월남에 지원병을 보내고 있을 때다.
내 나이 14살 중학교 일학년으로 생각이 든다.
강원도 시골 조그마한 동네에서 딸 다섯을 키우며 혼자 사시는 어머니 슬하에 나는 맏딸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어머니가 남의 집 바느질 삯을 팔아서 자식들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는 어려운 집안이었기 때문에 맏이인 내가 중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매우 힘든 실정이었다.
그 당시 강원도 화천의 오음리(간척리)라는 곳에서는 파월 장병들이 월남에 가기전에 훈련을 받는 훈련장이 있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훈련을 마친 병사들이 월남으로 가는 수송선을 타기 위해 부산으로 이동할 때 학교에서는 자주 환송식에 나가곤 했다. 1966년 4월 어느 날 그날도 우리는 오음리에서 훈련을 받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파월 군인 오빠들을 환송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모두 길가에 늘어서서 손을 흔들며 종이 쪽지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 트럭에 탑승한 군인 아저씨들에게 던지며 “꼭 이기고 돌아 오세요!” “가시면 꼭 편지하세요!”라고 소리 높여 소리 질러댔다. 나도 열심히 군용 트럭을 향해 내 이름과 주소가 적힌 쪽지를 던졌었다.
그런 일들이 여러 번 있었던 어느 날 나에게 월남 맹호부대에서 편지가 한 통 날아왔다.
“맹호부대 일병 조용근” 이렇게 편지 봉투에 적혀 있었다.
그 후 조용근 오빠와 나는 서로 편지를 주고 받게 되었다.

나도 열심히 위문 편지를 쓰며 나를 소개했고, 오빠도 자기를 소개 하면서 많은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월남의 조용근 오빠에게서 “학교 기성회비에 쓰거라”라는 내용과 함께 돈이 동봉된 편지가 왔다.
나는 밑으로 동생들 넷이 있는 상태라서 학교에 내는 기성회비가 집안에 많은 부담이 되던 터라 조용근 오빠가 보내 준 돈이 너무도 고맙고 감사했다.
그 후로도 오빠는 기성회비 명목의 장학금을 계속해서 보내 주셨는데 그 돈의 규모가 내 기성회비를 내고도 남을 만큼 큰 금액이었다.
그래서 조용근 오빠에게 편지로 의논을 해서 남은 돈을 생활이 어려운 다른 학생들도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했고, 오빠는 학교와 상의를 해서 몇 명의 어려운 학생들에게도 추가로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조용근 오빠는 여러 명의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장학금을 보내 주는 것이 힘들어 같은 부대 전우인 최병락 오빠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동참을 요청 하였고 최병락 오빠는 흔쾌히 동참 해 주셨다고 한다.
당시 나는 최병락 오빠에게도 고마움의 위문 편지를 여러 번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와 여러 명의 중학교 동문들은 두 분의 장학금 혜택을 받으며 모두 중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두 분은 월남 참전을 마치고 귀국을 하셨다. 두분 중 조용근 오빠는 귀국하여 양구에 있는 부대에 배치 되었다는 소식을 알았으나 최병락 오빠의 소식은 귀국하며 끊기게 되었다.
오느 정도 시간이 흘러 나는 조용근 오빠에게 인사를 드리러 양구에 위치한 부대를 찾아 갔지만 훈련을 나가는 바람에 만나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게 되었다.
만나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려 찾아 갔지만 결국 만나지 못하고 돌아 온 이후 오빠와 나는 서로의 소식이 끊기게 되었다.

그 후 나는 197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한국과 미국에서 서로의 바쁜 인생을 살아왔다.
세월이 흘러 나에게도 가정이 생겨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 아이들이 자라 학교에 다니게 되어 학비를 내야 하는 때마다 나는 자주 두 분들이 생각나곤 했다.
그 옛날 우리나라가 아주 어려웠던 시절, 월남에서 목숨 걸고 번 돈ks 후배인 우리들에게 아낌없이 장학금을 보내 주셨던,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분들이지만 그 두 분이 항상 생각이 나곤 했다.
언젠가는 한국에 가면 꼭 찾아 뵙고 오늘의 내가 있게 한 고마운 오빠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지 하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지만 한국에 올 기회가 잘 생기지도 않았고 또 미국에서 하는 일이 늘 바빠 늘 마은만 갖고 살았다.
그러던 중 작년에 한국에 올 기회가 생겨 맘 먹고 옛날의 기억을 살려 조용근 오빠를 찾았다. 재향군인회, 월남전 참전 전우회, 맹호부대 전우회... 등 여러 전우회의 지역별 전우회에 일일이 전화하며 확인을 했지만 개인정보 보호 문제와 부 정확한 정보로 찾지를 못했다. 조용근이란 이름의 월남 참전 용사도 꽤 여러 명이 있었고 일일이 전화했지만 찾지를 못했다.
작년엔 아쉬움을 갖고 미국으로 돌아 갔지만, 이번에 꼭 다시 찾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엘 왔다.
한국에 도착하여 여러 가지 바쁜 일들이 있었지만 나는 다시 조용근 오빠를 찾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부탁도 하고, 주위에 아는 분들에게도 부탁하는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찾기 시작했지만 개인정보 보호문제로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던 6월 12일 4명의 월남전 참전 조용근의 연락처를 입수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차례대로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조용근씨는 통화를 해 보니 내가 아는 분이 아니었다. 실망...
두 번째 전화번호를 누르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으셨다.
“조용근씨 되세요?”
오빠는 “네”하고 대답하셨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월남 참전하셨죠?” “맹호부대 근무 하셨어요?”라고 물으니 “네”하신다.
“제가 멀리 미국에서 왔는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라며 제 소개를 하고 “제가 강원도 화천 시골 학교에 다닐 때 학비를 보내 주셨는데요”라고 얘기 했더니 오빠는 바로 저를 기억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서로를 확인했다.
6월 14일 나는 오빠를 만나기 위해 오빠가 사는 군산행 고속버를 탔다.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입은 옷을 설명하긴 했지만 잘 알아볼까?
군산행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가슴이 뛰고 설렜다.
47년동안 마음에 담고 있던, 오늘의 내가 있게 한 고마운 은인인 오빠를 이제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군산까지 가는 내내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군산에 도착하고 그 옛날 편지로 보내준 일등병 군복의 옆모습 사진만 생각하며 오빠를 만났다.
버스 계단을 내려가는 나는 떨렸고 오빠의 얼굴도 많이 상기돼 있었다.

이렇게 나는 47년간 마음에 늘 간직하던 은인을 만났다.
편지로만 만났던 꿈 많던 여중생이었던 나와 혈기 왕성했던 오빠는 거의 반세기가 흘러 이제 60이   소녀와, 70이 된 청년으로 첫 만남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옛날, 목숨을 담보로 벌었던 돈을 아낌없이 후배의 장학금으로 보내 주셨던 오빠에게 조금이나마 그 보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린다.
군산에서 오빠와 예전의 추억과, 각자의 살아온 이야기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오빠는 최병락 오빠의 소식을 알아보고 만나기로 했다.
오빠의 수소문 끝에 최병락 오빠가 원주에서 큰 농장을 경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나와 조용근 오빠는 6월 18일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만나 함께 병락 오빠를 만나러 원주로 향했다.
두 분도 월남에서 귀국 후 헤어져 45년여 만에 만난다고 했다. 원주 터미널에서 병락 오빠가 마중을 나왔지만 두 사람도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서로를 몰라보고 지나쳐 버렸다. 우리들은 만나서 함께 병락 오빠가 경영하는 농장에 도착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두 분도 오랜만에 만나 옛 이야기를 나누며 너무 즐거워 하셨다. 병락 오빠는 원주에서 굉장히 큰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너무도 만나고 싶었던 두 분을 모두 만나게 되었다. 지난 50여년간 늘 마음에 간직하던 은인들을 만나게 해 주신 하느님께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편집: 임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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